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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이의 Turkey Story] 4. Chatting 수다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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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매드 작성일15-08-20 15:17 조회1,0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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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hatting 수다거리
 
산타클로스와 성 니콜라우스
 
바닷가 마을 , 뎀레(Demre)가 유명한 것은 바로 산타클로스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에 루돌프 사슴을 타고 와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빨간 옷의 산타클로스. 그 동화 속 할아버지의 실제 인물인 성 니콜라오스 (270년 경~346년)‘가 주교로 있던 곳이다.
 
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가 먼저겠지만, 그리스 정교회나 카톨릭, 기독교에서는 대표적인 성인으로서 성 니콜라오스를 숭배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억울한 사람에게 힘이 돼 준 그의 생전의 업적이 약자와 뱃사람과 여행자의 보호 성인으로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또한 그의 이름을 딴 ‘ 성 니콜라오스 ’ 교회는 그리스 정교회가 세계에 첫 반석을 올릴 때 쓰여지는 명칭이다. 우리나라 아현동의 첫 정교회도 성니콜라오스 교회다.
 
그러나 정작 그가 주교로 있던 성 니콜라오스 교회는 폐허처럼 남아있다. 3세기부터 있었던 교회의 자리에 6세기 현재의 모습의 교회가 지어졌고 이후 증축되었으나 이슬람의 점령과 자연 재해 속에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파손됐다. 그리고 이슬람을 믿는 터키의 무관심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지는 방치되었다. 중앙 홀과 두 개의 회랑이 있는 바실리카 형식의 교회는 입구 바닥에 모자이크 장식이 있고, 현관 벽에 파손된 프레스코 성화가 있다. 니콜라오스 성인을 제외한다면, 사람들이 이곳을 둘러볼 매력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저 우중충한 모습이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죽은 자를 신화로 포장해서 유통시키는 자본의 힘이다. 니콜라오스 생전의 수많은 선행은 2차 대전 후 관광산업 부활의 기치를 내건 핀란드에 의해 산타클로스로 재탄생했고 여기서 굴뚝, 선물, 어린이, 순록과 같은 장치물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니콜라오스가 지참금이 없어 고민하는 귀족의 세 딸에게 몰래 금화 주머니 세 개를 굴뚝으로 떨어뜨려 전달했다는 선행에서 산타클로스가 굴뚝으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달한다는 식으로 가공되는 것이다. 산타클로스의 빨간 색, 하얀 색의 옷은 1930년대 코카콜라 광고가 만들어낸 이미지다. 결국 우리는 자본이 만들어 낸 이미지 속에서 산타클로스를 소비했다는 것인데, 생기 하나 없는 성니콜라우스 교회를 나오면 그 주변의 기념품 가게들의 활기찬 모습에서 자본의 위력을 실감한다.  아무리 터키의 이슬람을 세속 이슬람이라고 하지만, 십자가를 기념품으로 진열해 놓고 성가를 틀어놓는 이 하해와 같은 종교적 관대함이라니. 여하튼 미라를 갈 때, 산타클로스의 기원 또는 원형을 찾아 간다는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뭔가 적절해보이지는 않는다. 산타의 기원을 찾으려면 코카콜라 공장을 가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인 니콜라우스의 봉사와 희생, 그리고 선행의 행적을 기리는 장소로서 미라는 더 빛날 것이다.
 
 
터키에서 듣는 하루 다섯 번의 '아잔'
 
이슬람 국가를 여행하다 보면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윙하고 울린다. 하루 다섯 차례(일몰 직후, 밤, 새벽, 낮, 오후)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방송이고 이를 <아잔> 이라고 한다. ‘ 아잔’ 은 ‘알라는 위대하다’로 시작해서 ‘알라 외에 신은 없다’ 로 끝난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 이슬람, 일상 속 수행을 강조하는 이슬람의 ‘정신’과 ‘규율’ 이 <아잔>을 통해 잘 드러난다.
 
터키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비록 터키가 이슬람 국가로서는 거의 유일한 민주국가 이자 탈 종교국가이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세속 이슬람주의라고 하더라도 모스크에 모여 기도하는 의식은 철저히 지킨다.
 
이슬람을 생활이 아닌 뉴스 정도로 접하는 우리에게 , 터키와 같은 이슬람 국가를 여행한다는 것은 이슬람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나는 터키를 여행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웃으며 이야기 하는 ‘사이비 이슬람교’ 가 좋았다. 여자들에게 부르카(또는 히잡) 쓰기를 강요하지 않고, 자기 종교만을 위한 폭력을 성전“(자하드)이라고 억지 부르지 않는 탈 근본주의가 나는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평화와 평등이라는 이슬람 사상의 중심을 지켜나가고 있었고, 무함마드 자체가 아닌 그가 추구한 삶을 살기 원하며, 하느님(알라) 말씀에 복종하고 기독교의 복음과 선지자 예수까지 믿음의 범주로 수용하는 그 포용성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장미로 유명한 데니즐리의 구네아겐트 작은 마을에서 아잔의 울림을 들었을 때, 나는 이것도 누군가에는 소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자동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한적함, 길거리 햇볕 좋은 곳이나 가게 앞에 나와 앉아 한담을 나누는 많은 노인들의 졸음 같은 평화의 한 가운데서 아잔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 거침없는 기도 소리가 내 고막의 금을 쩍쩍 가게하고 신경을 긁기 시작했을 때, 일요일 평화를 깨던 우리 동네 채소 장수 아저씨의 마이크 소리와 버스에서 들려오는 트로트 소리가 연상되면서, 종교의 자유를 준다고 하면서 낮잠을 자거나, 혹은 여행자거나,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이 누릴 고요함의 권리는 왜 무시하는 것인지 반감이 생겼던 것이다.
 
구네아겐트의 평화로운 모습
 
나중에 이 생각을 터키 사람에게 말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 태어나는 순간부터 늘 아잔을 듣다보면 그 소리에 너무나 익숙해진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종교든 사상이든 정치든, ‘싱싱한 배추가 왔어요’ 든 ‘ 당신이 부르면 무조건 달려갈거야’ 든 전체를 향해 일괄 발사하는 기계 소리는, 좀 아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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