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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재그 힐링]아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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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매드 작성일12-09-03 13:22 조회2,0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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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발우공양, 아귀를 위하여...

백양사 템플스테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최근 다녀온 2박3일간의 템플스테이(백양사,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발우공양이었습니다. 그런데 1시간 남짓 걸리는 발우공양 의식 중에서도 제 마음에 특히 와닿은 순서는 아귀를 위해 청수를 남겨주는 것이었어요. 공양을 한 4개의 발우는 차례차례 청수를 옮겨가며 손으로 닦는데(물로 설거지를 하는 대신), 이렇게 발우를 다 닦은 청수는 퇴수통에 붓습니다. 발우공양에서 퇴수는 아귀에게 주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발우를 닦고난 청수를 퇴수통에 부을 때 밥 한톨이나 고춧가루 하나라도 통에 들어가지 않도록 맑은 물만 붓고 찌꺼기는 자신이 먹어야 해요.


불교에서 아귀는 사람이 죽은 후에 윤회하는 육도 중에서 늘 배고픔에 괴로워하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목구멍은 바늘만 한데 배는 산만큼 커서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은 존재라지요. 바늘구멍만한 아귀의 목에 걸린 음식찌꺼기는 불이 되어 아귀들의 목구멍을 태운다고 합니다. 즉 아귀들이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건 사람이 남긴 청수 뿐인데 여기에 음식 찌꺼기가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아귀들이 저토록 참담한 고통을 겪기에 자잘한 건더기라도 남기면 안된다는 거예요. 발우공양을 지도하신 스님으로부터 이 얘기를 듣는 순간 하마터면 울 뻔 했습니다. 살면서 어쩌다가 “아귀같은 인간” “아귀다툼” 등의 말을 더없이 경멸적인 어조로 내뱉은 일이 더러 있었던지라 이렇게 울컥하는 스스로에게 의아하기도 했구요.


자신이 공양한 발우를 정리한 모습. 공양을 한 발우들에 청수를 부어 발우 하나하나씩 차례로 닦은 후
청수는 아귀를 위해 남겨줍니다.



인간으로서의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탐욕스러운 이를 아귀같은 자라고 지칭하잖아요? 제 뱃속에 더 집어넣을 여유도 없는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작정 꾸역꾸역 뭔가를 삼키는 자... 이런 아귀같은 인간을 우리는 경멸하고 혐오하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주로 힘을 갖고 횡포를 부리는 자들 가운데 아귀에 빗댈 이들이 많기도 하구요. 이런 동시대 현실에서 아귀같은 자들이란 어쩌면 뭇사람으로부터 “제 스스로 삼킨 건더기에 제 목이 막혀 죽기를 바라는” 저주를 받을 정도로 원한을 사는 존재들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백보 양보해서 “아무것도 삼키지 못해 물만 먹을 수 있는” 처지로 전락하길 바라는...


이렇게 아귀에 관해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한 상태였건만, 마치 “개수대의 설거지물처럼 보이는(템플스테이에 참가한 분의 표현^^)” 발우 속 내용물을 아귀를 위해 기꺼이, 혹은 눈 질끈 감은 채 삼키고 정화하면서 느꼈던 먹먹함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집에 돌아온 후 며칠 동안 여기에 대해 내내 자문해 보았습니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들이 간단치 않아서 글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마침내 “나도 어쩌면 다소 아귀스러워서 그렇지 않은가? ”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자학인가 싶다가 차츰 어느 정도 일리있는 ‘진단’이 아닐까 싶어지더군요. 먹고 입고 자는 것에서부터 필요 이상의 것을 취하려는 욕심이 점점 심해지면, 그리고 이런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계속 같은 패턴을 되풀이하면 아귀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발우공양을 마친 후 다음 공양을 위해 각자의 발우들을 나란히 정돈해 놓습니다.



아귀를 위한 이 의식(儀式)에서 제 마음을 움직였던 점은 이처럼 가장 경멸적인 존재를 위해 무언가를 배려하는 숭고한 의도와 아울러 제 안의 아귀스러움을 보게 한 것, 이 두가지 측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2. 배고픔, 불만족, 공허함, 그리고...

정신과 의사이며 불교 심리학자로서, 심리적인 신경증 증상의 모델로 육도윤회를 받아들인 마크 엡스타인은 아귀를 두고 “여러 면에서 분노와 욕망의 융합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그에 따르면, 아귀들은 이뤄지지 않은 갈망으로 고통을 받고, 불가능한 만족을 끝없이 추구합니다. 자기 내부의 심한 공허함을 드러내며 이미 일어난 일마저 제 뜻대로 할 수 없을까 발을 구르는 존재들입니다. 티벳불교의 지도자 쵸감 트룽파 린포체는 아귀도의 특징을 이렇게 묘사해요. 끊임없이 확장하고, 부자를 원하고, 소비에 몰두하면서도 계속적으로 궁핍함을 느끼는 모습으로. 이렇듯 아귀의 세계는 현재에 만족할 줄 모르고 과거의 환상에 사로잡혀 끝없이 욕망을 쫓아간다는 것입니다.


부자 사업가인 남성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잘생기고 키도 크고 돈도 많아요. 장성한 자녀가 있는 그는 사이좋은(좋아 보이는) 부인을 두고도 끊임없이 상대를 바꾸어 외도합니다. 때론 동시에 두명의 여성과 바람을 피우기도 합니다. 한 여성에게 없는 점을 다른 여성이 갖고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하는 거죠. 재물욕심도 엄청납니다. 가진 게 많아서 주위에 사람이 모이지만 진실한 관계를 맺진 못해요. 너무 전형적인 아귀계 인간같아서;; 흡사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같기도 하죠? 그러나 한치의 거짓도 보태지 않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경제적 결핍을 어릴 때부터 지금껏 겪은 적이 없으며, 사랑을 넘치게 받고 자랐어요. 어떤 종류의 박탈감을 느껴본 적도 없고, 원하는 건 대부분 손에 넣으며 살았기 때문에 사람조차 자기가 원하면 모두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도 늘 공허해 합니다. 돈이든 사람이든 “가져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겠다”고 대놓고 말합니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의 가치를 진정으로 깨닫는 건 제가 보기에 불가능합니다. 이 남성을 생각하면 신경증 모델에서 아귀계로 특징지워지는 정서들인 소외, 갈망, 공허감, 무가치함 등의 말들이 떠오릅니다.


이 남성을 보면서, 어린 시절에 별다른 실존적 결핍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도 끝없는 허기에 시달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심리학자들이 말하듯 “어릴 때 받지 못한 보살핌이나 사랑에 대한 보상욕구”로 보기엔 무리가 있는 경우죠. 굳이 말하자면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결핍’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어린 시절부터 돈을 벌고 사용하는 일과 관련해 부모나 사회로부터 건강하고 합리적인 모델학습이 결핍되었다고 보는(서광스님)” 것이 타당할 수 있습니다. 혹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변수와 마주치며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겠구요...


돈 뿐 아니라 애정과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애정과 관심은 결핍과 과잉 모두 허기와 공허를 불러 원만한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듯 싶습니다. 적절한 선을 지켜야 할텐데, 세상의 어떤 부모들도 이렇게 지혜롭기 힘든 까닭에 모두가 나름의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기 마련이겠지요. 따라서 어떻게 하면 지칠 줄 모르는 이 욕망과 허기를 다스릴 수 있을지 숙제가 된 듯 합니다. 사람마다 그 이유야 다를 수 있겠지만 갈망과 허기, 그리고 공허의 반복을 느끼면서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순 없을테니까요.



3. 현대의 아귀들을 위한 처방전

천수경에는 “관세음보살이 아귀계에 나타나면 아귀들은 저절로 배가 부르게 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보통 관세음보살이 들고 있는 그릇에는 감로수가 담겼다고 하죠. 그런데 그 감로수는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요. 마크 엡스타인에 따르면 “먹는 음식은 만족되지 않는 욕구를 결코 채워줄 수 없기 때문에 그릇에는 붓다가 완성한 ‘비판단적 알아차림’의 가르침이 들어 있고 이것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해요.


여기서 그가 말하는 비판단적 알아차림이란, 스스로의 행동을 평가,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우리에게 익숙한 ‘마음챙김’이란 말로 바꿔도 좋아요. 갈망과 공허함에 시달리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마음챙김이 자기치유의 핵심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어요. 그런데 관세음보살의 그릇에는 이와 더불어 꼭 필요한 또다른 가르침이 들어 있을 것 같아요. 바로 ‘나’라는 자아를 만족시키려는 나르시시즘의 고통스런 갈망과 허기를 다스릴 수 있는, 다른 존재들을 향한 친절(자비나 사랑으로 바꿔도 좋아요), 선한 행위 말입니다. 그야말로 “뻔한 부처님 말씀”같아 지겨우신가요? 그렇다면 이런 걸 떠올려 보세요. 불만에 찬 투덜이가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만나 봉사하는 경험을 한 뒤 180도 달라지는 모습같은......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건 어쩌면 끝없는 갈망과 허기에 괴로운 ‘나’를 치유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일지도 몰라요. 사랑과 돌봄의 결핍은 받음으로써 일차적으로 채워지겠지만, 받아도 받아도 만족하지 못하는 과도한 갈망상태는 반대로 줌으로써 채워칠 수 있겠지요. 이럴 때 비로소 나르시스적이고 유아적인 상태를 벗어나게 되는 듯 싶어요. 꽁꽁 갑옷으로 둘러싸고 자기가 손해본 걸 곱씹으면 불행하지만, 누군가에게 뭔가를 주거나 도움이 되는 스스로를 떠올리면 행복해지는 경험!


그런데 상대방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고 관심과 사랑을 특정 대상에게 일방적으로 퍼부으려 하는 것도 자기중심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태도 역시 아귀처럼 끊임없이 허기진 상태에서 집착하는 것입니다. 연인이나 자녀, 가족에게 지나치게 집착하여 그들의 자율성과 여유를 박탈하고 숨막히게 하는 사람들...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과 애정을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괴로워 해요. 집착의 대상이 되었든 집착을 했던 입장이든 이런 경험이 아마 조금씩은 있을 거예요.


마음의 평화와 원만한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데 어쩌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한된 대상에만 머물던 관심과 애정을 다른 존재들에게로 넓혀 나가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 도덕이나 윤리의 차원을 떠나 스스로를 치유하는 길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는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괴로워 하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녀는 남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대오각성, 남편에게 집착하던 마음을 돌려 자신의 재능을 널리 이롭게 쓰려는 모습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녀 자신의 마음이 편해진 건 물론, 그토록 집착해도 마음을 잡지 못했던 남편의 관심이 차츰 그녀에게로 옮겨지는 변화를 목도한 건 놀라운 일이었어요. 역설입니다.

감로도(조선 18세기)에 그려진 목련존자(좌)와 음식을 구걸하는 아귀의 모습(우)입니다.
부처님의 제자인 목련존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음식공양을 베풀어서
아귀도에 빠진 어머니와 중생을 구제해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내 안의 아귀들을 억지로 밀어내려 하거나, 죄책감의 감옥에 그것들을 가둬버리거나 한다면 언젠가 그것들에 더 큰 보복을 당할 우려도 있을 거예요. 우리는 시시때때로 목마름과 갈망, 집착과 공허의 줄을 타고 왔다갔다 합니다. 그것들을 회피하고 떨치려 괴로운 안간힘을 쓰는 대신 내 안의 이 아귀들은 대체 어떤 것들인지 차라리 그 정체를 온전히 느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에게 맑은 물을 자꾸만 넣어줌으로써 목마름도 풀어주고 더러움도 씻어주는 게 필요할 터이예요. 흙탕물에 맑은 물을 자꾸 부어주면 결국엔 맑은 물이 되는 이치를 떠올리면서... 내 안의 아귀를 구제하려는 이런 노력이 아귀에게 남겨주는 청수에 담겨 있다고 보는 건 그럴듯 하지 않나요?^^


참고: 마크 엡스타인, 붓다의 심리학, 전현수.김성철 옮김, 학지사.

서광스님, 육도윤회 ③-아귀, 법보신문, 2012.3.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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