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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이의 중국이야기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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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매드 작성일12-08-13 16:07 조회1,9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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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레인이의 중국이야기 16

- 신니엔콰일러

2004.01.15.목요일
딴지관광청
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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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 다가오는 이맘때쯤, 나는 엄마 따라 장 보러 다니고 할아버지랑 마주앉아 제사상에 올릴 밤 까고 커다란 교자상 꺼내 반질반질 닦고 있느라 바쁘다.

기름 냄새 진동한다고 호들갑 떨면서도 오다가다 동그랑땡이랑 녹두전 몰래 집어먹고, 동생들 돌보라고 하면 내 방에 몰아 넣고 정종 한 잔씩 먹여서 재우고, 설날마다 해주는 성룡 영화보고 뒹굴거리면서 말이다.

아빠랑 엄마랑 작은엄마, 작은아빠들이 거실에 둘러앉아 속 꽉 채운 보름달 같은 만두 만들고 딱딱하게 얼은 가래떡 두 손으로 조심스레 꼭꼭 눌러 썰 때, 난 사촌 동생들과 피카츄 모양의 만두 만들고 손 바닥만한 왕 만두 만들고 가래떡으로 칼싸움하다 부러지면 불에 구워 꿀 찍어먹고... 그러다 어른들한테 다 큰게 더 한다고 한 소리 듣는 거구~

또 명절 때 빠질 수 없는 놀이, 섰다([명사] 화투 노름 가지)! 우리 집은 명절 때마다 할아버지에서부터 손자, 손녀까지 대략 열댓명이 모여서 섰다를 한다. 인원이 좀 되다보니 판돈이 커져 분위기가 화기애매해지기 일쑤지만, 서로 얼굴 마주보고 얘기 나눠가며 하는 백 원짜리 이 작은 노름이 즐거워 우리 식구들은 설날이 되면 잔돈 먼저 두둑히 준비해놓는다.

그렇게 설 전날, 뽁짝스럽게 제사 음식을 준비하고, 섰다로 서로의 주머니를 채워주기도 털어내기도 하고, 밀렸던 얘기들로 밤을 지새고 나면 어느 새 설 아침이 밝아온다.

일찍부터 알록달록 예쁜 한복 차려입느라 시끄러운 사촌 동생들 소리에 잠이 깨고, 교자상 두 개를 이어붙인 제사상에 준비한 음식들을 가득히 올려 제사 지내고, 터져서 만두피만 떠 다니는 왕만두와 피카츄, 각종 공룡이 둥둥 떠 있는 만두국을 먹으면 제사상에 절을 하지 않는 교회다니는 친척들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간의 토론이 한 바탕 이어진다.

매년 반복되는 결론도 끝도 없는 그 지리한 토론이 대강 마무리가 되면 자주빛 한복을 곱게 입은 할아버지께 어른들이 세배를 드리고, 병아리 마냥 삐약거리는 이쁜 사촌동생들이 엉덩이를 불쑥 올린 채 넙죽 엎드려 세배를 하고...

두 손 모아 받은 세뱃돈을 꾸깃하게 접어 한복에 매달린 작은 복 주머니에 집어넣자마자 잘 보관해주겠노라며 착한 표정으로 자식들의 돈을 갈취해(!) 가는 엄마들. 빳빳한 지폐 대신 찰랑거리는 잔돈 몇 개 쥐어주면 신이 나서 가게로 달려가는 아직 어린 꼬맹이들.

살짝 얼어 입안이 얼얼해지는 식혜도 마시고, 간 밤에 할아버지와 함께 깐 밤도 오도독 씹어 먹고, 달큰한 약과랑 한과도 먹고, 전날밤에 주머니 털린 사람들의 성화로 섰다 몇 번 하고, 부른 배 두드려가며 할아버지 무릎 베고 누워 TV 보다가 잠들었다 깼다가를 몇 번 반복하고 나면 벌써 하늘이 어둑해지고 서서히 설 날도 저물어가는 거다.

큰 집이라 명절 때가 되면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그 집의 딸이라 모든 심부름을 도맡아 해야하고 장남, 장녀인 부모님 덕에 사촌언니오빠 하나없이 혼자서 동생들 돌보느라 힘들지만 중국에서 처음으로 혼자 보낸 설날을 생각하면 이렇게 정신없이 시끌벅적한게 차라리 고맙기까지 하다.

타국에서 혼자 처음 맞아 본 설날은 외롭고 쓸쓸하고 허전하고 심심하고 청승맞고 짜증났다. 엄마가 끓여주는 떡국 생각도 간절했고, 불룩한 할아버지 배 만지면서 품에 꼭 안겨있고도 싶었고, 세배돈 주기 전엔 절대로 일어서지 않으며 절값 달라고 땡깡을 피우고도 싶었고, 잃어도 좋으니 식구들과 시끄럽게 떠들면서 섰다도 하고 싶었고, 빽빽 울어대고 말도 무지하게 안 들어먹는 사촌동생들 마저 보고 싶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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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로 나마 그 곳의 설 분위기를 좀 느껴볼려해도 음식 준비하느라 바쁜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떡국은 먹었는지 묻지도 않고 아빠한테 수화기를 넘겼고, 아빤 세뱃돈 못 받아서 어떡하냐며 잔뜩 약만 올리고 할아버지한테 수화기를 넘기고, 국제전화비 걱정이 태산인 할아버지는 이래저래 투정부리는 손녀딸의 말을 싹둑 잘라먹고는 어서 돌아오라는 말을 끝으로 수화기를 내려 놓으셨다.

아~ 정말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뻥 뚫려 버린다. 가뜩이나 수화기 넘어로 들려오는 사촌동생들의 시끄러운 소리에 내 마음도 덩달아 어수선해져 버렸는데 그렇게 후딱 매정하게 어이없이 순식간에 전화 끊김을 당하다니... 잠시 동안 머리 속에서 뭉글뭉글 피어올라 날 감상에 빠트렸던 그리운 것들이 이내 증오로 바뀌는 듯 했다.

아는 사람들은 명절 보내러 거의 한국으로 돌아가고 연휴 때문에 상점이나 식당들은 거의 문을 닫아 어디가서 놀 곳도 마땅치 않았다. TV 를 틀어도 볼 만한 게 없고 채널마다 나오는 경극은 가뜩이나 화약소리 때문에 예민해져 있는 귀에 몹시 해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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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설이 가장 큰 명절이다. 춘절(春節)이라고 불리는 이 기간 동안은 집앞 가게도 관공서도 문을 닫는다. 길게는 한 달까지 문을 닫는 곳도 있는데 동쪽에서 서쪽까지 기차로 꼬박 5 일이 걸린다고하니 왕복 이동시간만 10 일을 잡으면 그 만큼 쉴 만도 하다.

집 대문에는 복을 기원하는 빨간색과 노란색 투성이의 춘련(春聯)을 붙이는데 복이 쏟아지라는 의미에서 복() 자를 거꾸로 붙이거나 발그스레한 볼이 터질듯 한 어린 아이가 물고기를 안고 있는 그림같은 것들을 붙여 놓는다.

그리고 고막이 터질 듯이 울려대는 폭죽소리. 악귀를 쫓아낸다는 의미로 춘절에는 집집마다 화약을 터트려 대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하늘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다. 몇 해 전부터 베이징(北京)을 비롯한 주요 도시엔 법적으로 금지해놨다던데 내가 있던 티엔진(天津)은 법이고 뭐고 없다.

불만 붙여서 나몰라라 도로에 내팽겨친 폭죽이 한 가득이고 여기저기서 터지는 화약소리 때문에 하루종일 귀가 멍멍하고 정신이 없다. 게다가 화약이 터진 자리는 어찌나 지저분하고 냄새가 고약한지 며칠은 그 빨간 화약 쓰레기들과 냄새 때문에 고생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시끄럽거나 말거나 거리가 더러워지거나 말거나 복을 기원하고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중국 사람들의 오랜 풍습을 탓할 수는 없다. 내가 중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은 폭죽을 터트리거나 문에 춘련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손을 흔들며 '신니엔콰일러(新年快樂,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삿말을 건네고 즐거운 새해를 함께 맞이하(는 척이라도 하)면 되는 거다.

난 그냥 그렇게 화약 터져가는 소리에 가끔씩 깜짝 놀래주고 전혀 이쁘지 않게 불꽃을 내는 폭죽이나 쳐다보며 쾨쾨한 냄새와 함께 설날을 보냈다. 이래가지고는 전혀 신니엔콰일러일 수가 없다고 한숨만 팍팍 내쉬다가 친하게 지내던 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언니도 허해진 가슴을 끌어안고 방안을 뒹굴고 있었다. 오전엔 바람이나 쐬려고 나갔는데 여기저기서 터지는 화약에 깜짝 놀라 집으로 돌아와 근신중이랬다. 언니와 신세타령하면서 전화기만 붙들고 있자니 더욱 더 처량맞아 보이길래 한국에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을 불러서 같이 떡국이나 끓여먹기로 했다.

결국 둘이 먹었다. -.-

집에 조금 남아있던 떡국 떡(조선족이 운영하는 방앗간이 있었는데 난 가끔 그곳에서 떡국 떡이나 떡볶이떡을 주문해 놓았다)을 자전거 앞 바구니에 싣고 화약 때문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거리를 지나 언니네 기숙사에 무사히 도착, 전기 꼽아 쓰는 작은 쿠커에 떡국 끓이고 바닥에 눌러붙은 마지막 떡까지 박박 긁어가며 중국에서의 첫 설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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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끔 중국에 대한 병이 도질 때면 그때 그렇게 시끄럽다고 투덜대던 화약소리마저 그리워진다. 화약은 설 날 뿐아니라 새로 문을 연 가게,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의 행사에 자주 사용되어 심심치 않게 내 심장을 조였다 풀었다 했지만... 중국 아니면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소리고, 이건 그동안 아무한테 말하지 않은 비밀인데... 나도 화약 사서 놀아 봤다. -.-;

고문화 거리(우리나라의 인사동과 비슷한 거리)에 놀러갔다가 호기심에 하나 사 봤는데 화약이라면 질색을 하던 한국 친구들한테는 차마 샀다는 말도 못하고 혼자 몰래 해본 적이 있다. 사람들 없을 때를 기다렸다가 화약 꼬리에 불 붙여서 아파트 앞에다 휙~ 하니 던져 놓고 잽싸게 뛰어들어와 창문에 숨어서 몰래 지켜봤는데 그게 은근히 스릴도 있고 재미도 있고... 하하 ^^;

아마 지금쯤 중국 시장엔 빨간색 춘련들이 수북히 쌓여있고 화약가게 앞엔 빨간 화약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거다. 기차역엔 고향가는 표를 사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이고 가게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고 말이다.

한국에서 설날을 보내려니 이번엔 또 중국의 설날이 그리워진다. 머리를 흔들어대던 화약소리가 듣고 싶다. 간질간질 피어오르던 화약연기도 보고싶고 빨간 종이로 어지럽혀진 거리도 걷고 싶다. 지금같으면 그깟 화약냄새쯤은 기분좋게 들여마실 수 도 있을 것 같다. 언제쯤 중국의 그 시끄러운 설날을 다시 맞이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긴 할까?

중국에서 보낸 두 번째 설날은 중국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꽤 많아서 집에 다같이 모여 만두도 빚어 떡국도 끓여 먹고 고스톱도 치고 꽤 알차게(?) 보냈드랬다. 물론 시끄러운 화약소리와 그 특유의 냄새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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