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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생몽사] 사라진 부산의 근대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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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매드 작성일70-01-01 09:33 조회2,4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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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생몽사의 싸롱드 부산]

사라진 부산의 근대 건축물

2012. 02. 02. 목요일
노매드 관광청
취생몽사


일본은 강화도에서 일어난 운양호(雲揚號)사건을 빌미로 군사력을 앞세워 조선의 문호를 개방할 것을 강요한다. 그 결과 1876년 2월 27일 총 12조로 된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 이른바 강화도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의 제5조는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여한다"라고 되어있다.

말이 좋아 '개항'이지 남의 나라의 협박에 못이겨 내 나라의 앞문을 열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1854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동경 앞바다에 흑선함대를 끌고와 무력시위를 통해 일본을 개항시킨 것과 어쩜 그리도 똑같은지... 돌이켜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부산은 개항이 되고 작은 어촌 이었던 부산포는 부산항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부산의 근대화의 시작인 셈이다. 1877년 부산항은 조선이 일본에게 빌려주는 땅인 조계지(租界地)가 된다. 조계지의 면적은 용두산 일대 약 11만평. 대여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는 영구대여를 위해 일본 정부가 조선 정부에 지불한 임대료는 연간 50엔에 불과했다.

50엔, 이게 얼마나될까? 1900년도 일본 남성 노동자의 한 달 평균 임금이 40~50엔인데 이는 3~4명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기에 조차 불가능한 액수였다. 이렇듯 우리네 근대사는 파고들면 들수록 분통 터지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일본인들은 조계지를 마치 자기네 영토인양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고 훗날 이 곳은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거듭난다.

식민지 수탈과 대륙침략의 거점이라는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부산 조계지 개발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각별했다. 부산에는 당시로서는 최초·최대라는 수식어가 붙는 건물들이 속속 들어섰다. 새로운 소재와 건축양식이 일본 본토와 시차를 두지 않고 도입되었으며 대형 토목공사 역시 활발하게 이뤄졌다. 수많은 일본식 목조건물, 서양식 벽돌과 대리석건물, 일본식과 서양식이 절충된 건물들이 속속 도시를 채워갔다.

헌데 이 많던 건물들이 다 어디로갔을까? 말끔히 사라졌다. 화재로 불타기도 했고, 재건축을 위해 헐리기도 했으며, 문화유산의 보존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철거되기도 했다. 이처럼 식민지 시절의 아픈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린 부산은 세련된 현대식 건축물로 가득한 미래 지향적인 도시로 새롭게 태어났다... 고 말하기엔 웬지 겸연쩍다.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을 반드시 보존해야할 가치가 있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고, 문화유산이 가진 역사성과 예술적 가치 뿐만 아니라 일상적이고 지역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복원과 보존의 개념이 대두된 것 또한 최근의 일이다. 따라서 근대 건축물이 사라질 당시인 '과거의 판단과 사건'에 대해 현재의 관점으로 평가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 만큼은 쉬이 떨쳐 버리기 어렵다. 그 수많은 근대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부산의 이미지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상상을 자꾸만 하게된다. 더군다나 부산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중국의 칭따오나 일본의 나가사키의 현재와 비교하면 아쉬움은 커져만 간다.

다행스럽게 몇몇 근대 건축물은 그 역사적 중요성과 관점의 변화 등으로 인해 지정문화재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들 건물들에 대해서는 책을 통해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사라져버린 건물들은 소개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언급 조차 않고 넘어가려니 웬지 허전해서,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하려 한다. 이왕지사 알게된 거 그냥 묵혀 두려니 아까웠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부산역>



1908년 착공하여 1910년 완공되었다. 준공 당시 부산역은 부산세관, 부산우편국과 더불어 부산의 3대 르네상스식 건물로 꼽혔다. 부산역의 설계자는 메이지시대 일본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다쓰노 긴코(辰野金吾)다. 다쓰노는 일본의 국회의사당, 일본은행본점, 동경역 등을 설계하였으며 한국에서는 부산역과 조선은행본점(현 한국은행)을 설계했다. 준공 당시 부산역은 경성역(현 서울역) 보다 컸을뿐 아니라 1914년 동경역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일본 본토를 포함해도 최대 규모의 역사였다. 이 역은 1953년 발생한 대화재로 불타 버렸다. 사상 최대의 화재로 기록된 이 화재로 인해 부산역을 포함해 약 1만4천여 채의 건물과 가옥이 전소되었다.

이 사진을 보면 부산역 뒤로 부산세관과 제1부두, 제2부두가 위치해있다. 1900년대 초기 부산항은 일본의 오사카나 고베 보다 더 큰 항만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최대의 역사와 대규모 항만시설. 이를 통해 일본이 부산을 왜 개발하고 어떻게 활용하고자 했는지 그 속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부산세관>



1910년에 완공되었다. 항구도시로서 세관의 역할이 중요함에 따라 일본은 세관 건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곳은 당시 관청건물로는 보기드물게 ㄱ자형 평면의 비대칭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화강석과 벽돌이 잘 조화되게 구성하였으며 모퉁이에 4층의 첨탑을 세웠다. 비례관계가 잘 고려된 매우 아름다운 영국계 르네상스풍 건물로서 부산을 소개하는 그림엽서에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 1973년 부산시유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됐으나 1979년 6월 2일 도로확장 공사를 이유로 철거됐다. 현재는 첨탑의 끝부분만 부산본부세관 안뜰에 전시되어있다. 일본인들은 그거라도 보겠다면 꾸역꾸역 찾는다.

<부산 우편국>



개항과 더불어 부산에 첫 발을 디딘 서구문물은 우체국이었다.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봉화와 파발에 의존하고 있을 때였다. 최초의 우체국은 1976년 11월 부산항을 관리하는 일본관리청 내에 설치된 "일본제국 우편국사무소" 였다.

이후 1911년 현재의 부산체신청 근처 1,282평의 넓은 터에 화강암과 벽돌을 사용해 지상 3층, 지하 1층의 건물을 지었다. 부산에 건축된 서구식 건물 가운데 최초로 지하실이 있었다. 부산역, 부산세관과 더불어 부산의 3대 서구식 건물로 그 위용을 자랑하던 이곳은 부산역과 함께 1953년 대화재로 불타고 말았다.

<이사청(부산부청)>




부산항이 개항되고 일본인 조계지가 설정되자 일본은 곧장 감독관청을 세우게된다. 감독관청은 용두산 아래, 예전 왜관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고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이다. 이후 이사청(理事廳)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주변엔 거류민단사무소, 경찰서 등이 들어선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산부청(釜山府廳)이되고 목조건물은 벽돌건물로 신축했다. 식민지배가 강화될수록 행정업무가 늘어나고 일본인도 증가하게되자 1936년 현재 롯데백화점 광복점(예전 시청) 자리로 신청사를 짓고 이전한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계단 만큼은 예전 모습 그대로 아직 남아 있다.

<조흥은행 부산지점>



1827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일본 야스다(安田)은행 부산 지점으로 출발했다. 1952년 조흥은행 부산지점이 되었고 이후 조흥은행 영주동지점이됐다. 바로크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을 절충한 벽돌 건물로서 최근까지고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건물은 1987년 도로 확장공사 과정에 고가도로를 설치하기 위해 철거되었다. 애초에는 장소를 옮겨 복원할 예정이었으나 7억원이라는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영원히 자취를 감춰 버리게 된다.

<부산상품진열관>



오늘날 백화점에 해당하는 부산상품진열관은 1904년 준공되고 1905년에 개관식을 가졌다. 당시 부산에 선보인 서구식 건축물 가운데 가장 완벽한 건물이었다. 3층 벽돌 건물로 내외부는 물론 건축자재까지 붉은 벽돌과 잘 다음어진 화강함을 쓴 완벽한 서구식 기법으로 중세 프랑스 스타일이나 외부는 독일풍과 영국풍의 요소를 두루 갖춘 르네상스풍 건물이다. 1963년까지는 현존하고 있었으나, 그 이후 어느 시기에 철거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부평시장>

부산 최초의 상설시장이다. 1910년 개인 소유의 시장으로 영업이 시작되었고 1915년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부산부가 인수해 직영했다. 난전으로 운영되던 535평에 도로부지 651평을 편입해 기와지붕을 얹은 목조 단층 건물을 세웠다. 시장 내부에는 457개의 식료품과 일용 잡화 가게가 있었고 주변엔 수백개의 노점상이 영업을 했다.

부산부청에서 물가안정을 위해 가격 통제를 했던 까닭에 다른 지역보다 물건값이 10~20% 정도 저렴했다. 이 시장의 성공으로인해 공설시장 건설 움직임이 활성화 되었고 그에따라 남빈시장(지금의 자갈치시장)이 개설되었다. 이 시장이 현재 부산을 대표하는 국제시장, 부평시장, 깡통시장의 모태가 된다.


이외에도 수십여개가 넘는 부산의 근대건축물이 역사 속에 그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그럴수 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과 논리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헌데 지도를 펼쳐 이 건물들이 놓여있던 장소를 표시해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사라진 대부분의 건물들이 지금의 지하철 1호선 부산역, 중앙동역, 남포동역 사이에 위치해 있다. 개항 이후 그곳이 부산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물론 이 지역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로도 오랫 동안 부산의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로 기능해 왔다. 하지만 도심이 다극화되고 시청이 이전함에 따라 개항장으로서 100년가까이 영화를 누리던 지역이 낙후되기 시작했다. 부산은 이곳을 이른바 '원도심'이라 칭한다. 현재는 이 원도심을 활성화 시키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만약, 이 많은 건물들이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어 있었으면 어땠을까? 설령 사라졌다 하더라도 부산시의 재정이 넉넉해 복원이라도 됐으면 또 어땠을까? 식민지 침탈을 위해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 갤러리가되고, 박물관이되고, 도서관이된다면 그야말로 멋진 반전이 아닐까?

1925년에 지어진 경남도청 건물은 현재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조선 경제를 독점하고 착취하기 위해 1929년에 세워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은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변모했다.

더 많은 건물들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좀 더 냉철한 눈으로 근대를 바라 볼 필요가 있고, 이를 현재와 미래의 관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오진 않겠지만...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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