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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코트래블로지] 48. 할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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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매드 작성일70-01-01 09:33 조회4,3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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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코트래블로지]

48. 할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며

2008. 08 .29 금요일
정신건강 테라피스트 권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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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코트래블로지]는 여행과 정신심리를 접목시키는 기사입니다.

미국에서 정신과 상담 일을 하고 있는 작가에 의해 시도되는 이 연재는 작가가 여행지에서 혹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서 만난 사람들과 상담 사례들을 통해 우리 모두의 내면 여행에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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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동안의 조국방문 동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하나뿐인 내 동생의 결혼식이 슬픔으로 가려지면 어쩌나, 또 내가 미국으로 다시 떠난 다음에 그 일이 닥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7년 전의 내 결혼식이 그랬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아내는 자신의 할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전하며 눈물을 흘렸다. 가장 안타까웠던 건 이 양반이 어떻게 하든 결혼식 이후로 임종을 미루려고 애를 쓰셨던 것었이다. 그러나 그건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아내는 조부모님 아래서 자라 그분들과의 추억이 남다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더욱 슬퍼했고, 청첩장과 부고를 함께 받은 아내 쪽 집안의 지인들은 의아해 하기도 했다.

예비사위였던 나는 3일장을 함께 치르려 했으나 그쪽 어르신들이 극구 말렸다. 결혼식이라는 큰일을 앞둔 사람은 장례식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아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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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을 맞이하기 위해 누워있는 나의 할아버지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호흡이 곤란한 할아버지는 인공호흡기를 끼고 숨을 거칠게 몰아 쉬고 있었고, 병원의 호스피스 아주머니들과 친척들이 24시간 돌아가며 돌보고 있었다.

집안 어른들이 의사와 이야기를 했다. 조만간 집안에 결혼식이 있으니 최선을 다해 생명을 연장해줄 수 있는가 라고. 그리고 의사는 최선을 다해보겠노라고 했다.

물론 할아버지도 동생의 결혼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기력이 약했지만 정신은 맑았다. 대화도 가능했다. 힘이 없는 할아버지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귀를 할아버지의 입에 대고 반복해서 집중을 하니 나중에는 이내 익숙해져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목에 가래가 자주 끼어 힘들어 하셨지만 기침을 하면서 그걸 솎아내는 힘이 아직 있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했다. 그 가래를 닦아내다가 계속 나오면 간호원이 와서 얇은 투명 플라스틱 호스를 할아버지의 코에 집어 넣어 빨아 들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스러워 했다.

2008828173215[1].jpg 김포공항의 기억

그 놈의 지긋지긋한 김포공항...

내가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 사라져가는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목놓아 울던 곳이 그곳이다. 한번도 떨어진 적이 없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렇게 혼자서 가버리는 아버지를 영문도 모른 채 울면서 공항이 떠나가라 불러댔다. 형인 내가 우니까 네 살이었던 동생이 따라서 울었고 덩달아 어머니까지 통곡을 하듯 우셨었다.

그리고 14년의 시간이 흐른1991년 11월 12일 날은 전체 가족이 이민을 떠난 날이었다. 그때 울었던 여덟 살의 꼬마는 어른으로 장성을 했고 네 살짜리 동생은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옛날 아버지가 사라져 갔던 그곳으로 들어가려 했고, 우리 가족이 서서 울던 그 자리에는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수많은 친지들이 배웅을 나와 있었지만 오로지 할아버지만이 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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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모님 아래에서 자랐던 아내처럼 나도 사정이 있어 나의 조부모님들 손에 키워졌다. 그것도 아주 끔찍하게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자식을 많이 낳았던 옛날 분들이 다 그렇겠지만 나의 조부모님들도 손자 손녀들이 많았는데, 다른 친지들이 질투를 할 정도로 조부님의 나에 대한 편애는 아주 남달랐다.

내가 만으로 세 살 때 집안에 커다란 일이 벌어졌다. 할머니가 병원에 종합진단을 받으러 갔다가 갑작스럽게 고혈압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할머니가 얼마나 대단한 분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서 모르겠다. 다만, 그 충격으로 한집에 모여 커다란 과수원을 일구며 살던 8남매의 대식구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 중 아직 어렸던 몇몇은 오랜 시간 방황을 했다고 들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나중에 할머니 사진과 쏙 빼어 닮은 새 할머니를 얻으셨지만 그 분도 일찍 돌아가셨다. 틈날 때마다 할아버지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던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분은 평생 먼저가신 할머니가 없는 빈자리를 고통스러워 하셨다는 것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도 나에 대한 할아버지의 정성은 끊이지 않았다. 공항에서 이민을 떠나던 그 순간까지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 채워주던 나의 큰 기둥이었다. 그런 특별한 사이기에 헤어지는 게 당연히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내 눈에는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 할아버지의 모습만 크게 보였던 것이다.


“할아버지...제발 건강하시고…”


‘혹시 지금 할아버지의 이 모습이 마지막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꼭 성공해서 오너라”

나는 더 이상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울고 있었지만 우는 내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어서였다. 아마도 오래 전 가족과 생이별하던 아버지가 이러했을 터였다.

2008828173215[3].jpg 재회와 이별들

미국으로 이민을 온 후 지난 17여 년 동안 한국에 여섯 번 다녀왔다. 맨 처음 3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할아버지는 공항에서 나를 보자마자 덥석 껴안고 손을 잡고 춤을 추듯 공항 안을 빙빙 돌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매번 한국방문을 마치고 떠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이번이야말로 할아버지와 마지막은 아닐까…’


그러나 매번 할아버지는 정정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고 결국 한국에서 치뤘던 나의 결혼식까지 참석하고 흐뭇한 모습으로 절까지 받으셨다. 금방 장례를 치른 아내의 할아버지 일 때문에 폐백 실에 꿋꿋이 앉아있던 나의 할아버지가 더욱 고맙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괜시리 미안해서 그런 고마운 감정을 억지로 숨기고는 할아버지께 살갑게 하지 못하고 그때만은 다른 어른들 대하듯 했다.

할아버지를 미국에서 직접 모셔 본적이 있었다. 팔순이 넘은 키 크고 꼿꼿한 노인께서는 미국에서 머무시는 두 달간을 단정한 양복과 반짝이시는 검은 구두를 신고 나와 함께 활보하셨다. 걷는 게 어찌나 다리가 아프던지, 좀 쉬셔야 하지 않느냐는 나의 말이 내가 쉬고 싶은 핑계라는걸 눈치채고는 젊은 놈이 그리 힘이 없어 되겠느냐는 핀잔을 주시고는 계속 걸으셨다. 그 모습을 보고는 아직 한참을 사시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를 했었다.

미국이민 후 할아버지와는 항상 그랬다. 만날 때마다 정정한 모습에 안도했지만 헤어질 때마다 그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글펐다. 아마도 그런 마음은 한국에 늙은 조부모나 부모가 있는 타향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어떤 일치된 심리적 ‘한’ 일 것이다.


2008828173215[4].jpg할아버지

동생의 한국에서의 결혼식 날짜가 잡혔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할아버지께서도 병원에 입원을 했다. 아무리 정정했어도 아흔 한살이라고 하는 나이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어릴 적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할아버지는 외로움과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피웠다. 아마 그 이유로 해서 몇 년 전부터 할아버지의 폐에는 암이 자라고 있었고 의사는 고령을 이유로 수술을 만류했다.

의사의 말대로 노인에게는 암이 빨리 퍼지지 않아 지난 몇 년간 예전의 그 모습으로 그렇게 버틸 수 있었다.

부모님과 나는 한국에 얼마나 머물러야 하고 비행기를 어떻게 예약해야 하는지에 대해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동생의 결혼식 날짜가 잡힌 이후부터 몇 달째 입원해 계시며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버지와 나는 결혼식이 끝나더라도 한국에 남아 할아버지의 임종까지 지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정신 없이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이민 생활이다. 생활을 포기하면서 한국에 장기 체류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언제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지 쪽집게처럼 맞출 수도 없었다. 고민 끝에 부모님은 3주를 체류하기로 하시고 한국으로 먼저 떠났고 나는 2주 후에 보름 정도의 휴가를 내고 비행기를 탔다. 그러니까 부모님이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나와 가족은 일주일을 한국에 더 머물고 돌아가는 스케줄이었다.

할아버지는 병상에서 동생과 제수씨에게 인사를 받으며 기뻐했고 처음 본 내 두 어린 아이들을 보며 웃었다. 혼자 숨을 쉴 수가 없어서 호흡기를 끼고 있었지만 정신은 맑아 많은 대화가 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많은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말 상대 해주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분이라는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가 위태롭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러 번 달려갔지만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다시 멀쩡해져 있는 일이 반복되었다. 하루하루 더 뵐 수 있어서 좋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 장례까지 치르고 싶다는 욕심에 조바심 비슷한 이율배반적인 마음까지 있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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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결혼식이 있었다. 4대독자였던 할아버지가 번창시켰던 8남매의 가족들이 대부분 모였고 외가댁 5남매의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어릴 때 이 대가족의 틈새에서 즐거워하며 자라던 추억들이 새롬새롬 다시 피어났다. 사촌들은 대부분 결혼해서 또 다른 자손들을 데리고 결혼식에 왔고 나를 삼촌이라 부르는 처음 보는 아이들까지 수두룩했다.

아직 젊은 나였지만 세월이 간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펐다. 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이고 병원에 있는 할아버지는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없을 터였다.

2008828173215[6].jpg아버지

결혼식 후 아버지에게 커다란 문제가 생겼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짜가 다가와 버린 것이다. 미국에 있는 바쁜 일들을 다 접어두고 3주라는 최대한의 시간을 짜내서 어떻게든 할아버지의 임종과 맞추어보려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순진한 아버지는 비행기표를 연장하는 일이 쉬운 일인 줄 알았던 것 같다. 출국 전날 온갖 연줄을 모두 연결시켜 항공사의 최고위급 인사에게까지 부탁했건만 출국 하루 전에 비행기표를 며칠 더 연장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수기였던 8월에는 단 한자리조차 여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멀쩡한 사람의 좌석을 마음대로 취소시키고 아버지가 비집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임종하시면 다시 오겠다는 결심을 하고 할아버지와 마지막 작별을 하는데, 그런데 이게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아버지는 침상에 누워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의 손을 부여잡고는 통곡을 하며 떠나지를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운 다음 할아버지가 잠이 든 후에야 주변사람들에게 이끌려 그곳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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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828173215[8].jpg 임종을 누가 지켰는가

그 다음 날 아침 부모님은 비행기를 탔고 아직 미국 땅에 도착하지 못했을 밤시간이었다. 간병을 하다가 지친 큰아버님은 병원 로비에 앉아 쉬고 있었고 큰 어머님은 막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내가 문병을 했다. 그게 마지막 문병이었다.

할아버지는 가래가 끼고 암이 퍼진 가슴의 통증이 너무 힘들어 손을 얹고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기계로 가래를 빼달라고 했지만 목이 아닌 가슴에 고인 가래는 더 이상 빼낼 수 없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힘겹게 손을 움직이며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는 유언과 같은 마지막 말을 들었다.

내가… 너…를 참… 좋아했어…”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언제나처럼 참 따뜻했다. 간병인 아주머니 한 명이 내게로 다가와 말을 했다.

“ 내가 참 마음이 아픈 게…… 남들은 돌아가실 때 의식을 잃어버려 고통 없이 가는데 할아버님은 끝까지 멀쩡하게 의식이 붙어있는 거야. 그 몸의 통증을 모두 느끼며 고생하시는 모습이 참 안타까워.”


열심히 교회에 나간다는 그 아주머니는 할아버지 귀에 대고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이제 모두 다 내려놔요. 조금만 참으셔. 하느님이 금방 모시고 갈 거에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 할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니 해드릴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뭔가를 느꼈는지 그렇게 다가와 할아버지에게 한마디 해준 그 간병인 아주머니의 말이 참 위로가 되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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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게 정말 마지막 일줄 어찌 알았겠는가. 할아버지 옆에서 한참을 있기는 했지만 그날따라 일찍 들어와달라는 아내의 말이 계속 걸렸다. 하지만 마음에서는 또 다른 갈등이 일어났다. 형제들이 돌려가면서 간병을 하긴 했지만 지쳐서 로비에 앉아있는 칠순이 넘은 큰아버지 모습이 창문가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은 내가 곁에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오늘은 쉬시라는 말을 하기 위해 큰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근데 어찌된 건지 그 말이 입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몇 번이나 그 말을 하기 위해 큰아버지 주변을 서성이다가 포기를 하고 다시 할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

“ 할아버지 문수 내일 다시 올께요.”

할아버지는 웬일인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아직 거칠게 숨을 몰아 쉬고 있었고 내일도 뵐 수 있겠다 싶어 병원을 떠나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갔다.

집에 막 도착해 옷도 갈아입지 않았을 때 내 전화기가 울렸다.

‘아뿔싸… 조금 더 있었어야 하는 건데……’

그 날. 할아버지는 내가 자리를 뜨자마자 돌아가셨다. 사망판정이 날 때까지의 마지막 순간을 큰아버지가 지켰다. 내가 집에 돌아가 쉬라는 말을 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마지막 임종을 큰아버지가 지키게 해드린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정신이 붙어있을 때 곁을 지키고 대화를 한 건 바로 나였다. 얼마나 많은 할아버지의 자손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매일 할아버지를 문병했던가… 그런데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잠깐 날아온 제일 사랑하던 이 손자와 마지막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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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미국 행 비행기 안에 있을 아버지가 안타까웠다. 단 하루만 연장할 수 있었어도…아쉬움이 밀려왔다.

모두들 알다시피 나는 심리학을 공부 했고 상담학을 공부했다. 내가 공부한 학문은 철저하게 과학적인 근거에 따라야 하고 정신적인 어떤 이상현상 ? 초자연주의 같은- 이나 상황에 따른 과장된 해석을 배격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트레이닝이 되어버린 나는 할아버지로 인해 경험하게 된 모든 일들을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동생의 결혼식이 무사히 끝난 다음 돌아가신 것도 우연이고 내가 단지 2주의 계획으로 먼 타향에서 왔을 때 장례까지 마칠 수 있던 것도 우연이며 수많은 자손들을 뒤로하고 나와 마지막 순간을 보내신 것도 우연이다. 게다가 밤에 돌아가셔서 짧은 3일장이 되어 자손들의 수고를 덜어주신 것도 우연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로 인해 생긴 그 모든 우연들 때문에 나는 그분이 고맙고 또 고맙다.

사심이 많이 들어가 있는 할아버지의 일과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나를 다른 환자들과 비교하는 것은 어패가 있다.

하지만 항상 내가 느끼는 공통된 무기력감 같은 게 있다.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그 한마디. 그걸 나는 도저히 못하겠다. 아픈 사람은 마음이 참 여려지고 민감해진다. 윤동주 시인의 말처럼 바람에 날리는 잎새에도 괴로워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된다. 그래서 말한 마디가 위로가 될 수 있고 쉽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나는 테라피스트로써 어떤 위로를 해줄 수 있을까. 좀 달리 생각해서 내가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나는 어떤 말에 위로를 느낄 수 있을까. 내 자신이 더 많이 살아봐야 알 것 같다.

그리고 좀 외람된 말이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거나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이 세상에 얼마나 안타까운 죽음이 많던가. 나는 허전하고 슬픈 마음이 크기는 하지만 위에 이야기 했던 그런 일들을 조국방문 2주일간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러니까 나는 무척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과 마지막 몇 주만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뒤에 남아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이 훨씬 편해진다는 것이다. 그것만큼 좋은 치료가 어디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내가 목도한 할아버지의 죽음과 내가 느낀 소회들을 나누고 싶었다.

이미 늦었지만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나는 이런 말을 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 할아버지. 저에게 과분한 사랑주신 것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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